수년간 최고의 기대작에서 출시 후 심각한 버그와 성능 문제로 스토어 퇴출 및 무조건 환불 처리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그럼에도 불구하고 1,300만 장이나 팔린.. 이제는 문제작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사이버펑크 2077'(이하 사펑)을 100여 시간만에 마쳤다.
다행히 나는 PC판을 구입했기 때문에 콘솔 버전처럼 게임 진행이 불가능할 정도의 심각한 버그나 치명적인 오류는 보지 못했다.
하지만 캐릭터가 땅속으로 추락하거나 퀘스트 진행상 필요한 NPC가 나타나지 않거나, 휴대폰이나 담배 등의 오브젝트가 캐릭터와 떨어져 공중에 떠 있는 등 게임 흐름이나 몰입을 방해하는 크고 작은 버그들은 자주 겪었다.
버그와 더불어 많은 게이머들을 분노하게 만들고 개발사인 CDPR이 사기꾼으로 불리게 된 원흉인 허위, 과대광고도 문제였는데, 스포일러가 될까 봐 의도적으로 광고 트레일러나 개발 인터뷰 등을 잘 보지 않았음에도 '이미 충분히 기대작인데 마케팅을 이렇게까지 과하게 할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들 만큼 심하다고 느꼈었다.
사펑의 못난 점(?)들은 여러 게임 매체들의 리뷰부터 유튜브 영상들까지 수두룩하기에 나까지 보태고 싶지는 않지만 아쉬운 점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사펑은 'GTA5 + 위쳐3 + 폴아웃4'를 꿈꿨지만 GTA5의 자유도와 상호작용, 위쳐3의 섬세한 퀘스트, 폴아웃4의 성장, 모험 및 팩션 시스템 등 세 게임의 장점을 하나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러 부족함 속에서도 매우 인상적이고 훌륭하다고 느낀 부분이 세 가지 있는데, 첫 번째가 월드의 디자인이다.
사펑의 월드인 나이트 시티는 크기는 그렇게 크지 않지만 디자인과 디테일만큼은 지금까지 내가 경험해 본 오픈월드 중 가장 뛰어나다.
퀘스트 하러 다니다 멋진 곳을 발견하면 멈춰 서서 스크린샷을 찍는 것이 일상이었고, 특히 레이 트레이싱이 적용된 화려하고 강렬한 광원이 빚어내는 야경은 예술이었다.
두 번째는 총기 디자인인데, 총기 액션이 전투의 대부분인 일인칭 게임이라 당연히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이지만 일반적인 기대치를 초월하는 디테일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총기를 꺼낼 때 보여주는 저마다의 고유한 모션부터 재장전 모션도 총기별로 여러 개가 제공되고 재장전 시 탄창에 총알이 남아있는지 없는지 까지 구현을 해 놓았다.
마지막 세 번째는 차량 디자인인데, 등장하는 차량의 수는 그렇게 많지 않지만 역시 디테일이 끝내준다.
차량 외부의 디테일은 기본이고 내부까지 상당히 공들여 만들어 놓았는데, 사실상 쓸 일 없는 뒷좌석까지 꼼꼼하게 모델링 되어있고 계기판의 속도계는 물론이고 차량 내 라디오나 시계까지 동작하게끔 구현해 놓았다.
특히 몇몇 차량은 보닛이나 트렁크도 열리고 그 내부의 디테일까지 신경 써서 만들어놓았다.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디테일하고 훌륭하게 만들어 놓은 것들을 게임에서 제대로 활용을 안 한다는 것이다.
월드는 환상적이지만 정작 그 안을 채우고 있는 NPC들의 AI는 참담한 수준이고, 할 수 있는 미니게임이나 상호작용은 거의 없으며(하다 못해 의자에 마음대로 앉을 수도 없다), 주요 퀘스트 외에는 단순한 의뢰가 전부라 맵 구석구석 탐험할만한 요소도 없는 허울뿐인 세상이다.
총기도 마찬가지로 디테일은 끝내주지만 업그레이드로 단순히 대미지를 올릴 수 있을 뿐, 개조 부품을 장착해도 외형의 변화가 없고 컬러나 데칼 등의 커스터마이징이 전혀 안된다.
차량 역시 게임 내 이동수단으로써 비중이 큼에도 커스터마이즈 시스템이 없어서 내 입맛에 맞게 꾸밀 수 있는 게 전혀 없다. 최소한 도색 정도는 만들어줬어야 했다.
이렇듯 욕심에 비해 한참 부족한 개발 기간과 기술력 때문에 결과적으로 만들다 만 게임이 되어버린 것인데, 이런 거 다 못 본척하고 원래 CDPR이 잘하는 퀘스트 라인과 내러티브만 놓고 보더라도 전작인 위쳐3보다 못한 것이 사실이다.
물론 주요 캐릭터들의 매력적인 묘사와 캐릭터 간 대화 등의 뛰어난 연출은 여전하지만 주인공 V는 게롤트에 비해 훨씬 존재감이 떨어지고, 퀘스트 진행 시 선택에 따른 디테일한 분기 처리도 위쳐3보다 한참 부족하다.
CDPR의 장기였던 보조 및 부가 퀘스트의 설계도 게임 진행에 따라 물 흐르듯 이어지던 위쳐3의 그것과 달리 맵 안을 가득 채워 질리게 만드는 퀘스트 마크들과 수시로 울려대는 픽서들의 임무 전화로 툭하면 흐름이 깨지고 산만해진다.
이건 위쳐3의 서브 퀘스트 시스템과 비교당하며 늘 까이던 소위 'UBI식 오픈 월드' 게임들의 보조 퀘스트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 말 그대로 '퇴보'다.
재미있는 건 이렇게 단점과 아쉬운 점들이 많음에도 오랜만에 한 게임을 100시간 넘게 붙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사펑을 좀 더 쾌적하게 플레이하기 위해 3060Ti를 사고 기념으로 피규어도 구입하는 등 너무 기대가 컸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상 심리가 나도 모르게 작용되었을 수도 있고, 아쉽지만 그만큼 재미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제 남은 건 CDPR의 이후 행보인데, 과연 욕하다 못해 조롱까지 당한 부족한 완성도를 무료 DLC 등으로 보완해 나가며 땅에 떨어진 게이머들의 신뢰와 회사의 이미지를 회복할 것인지, 아니면 적당히 버그 패치만 하고 슬그머니 접을지 지켜봐야 한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위쳐3 때처럼 확장팩 수준의 유료 DLC들과 별도의 멀티플레이까지 출시되어야 하지만 현재 상태로는 한참 더 미래의 일이 되거나 취소될 확률도 있어 보인다.
물론 나를 비롯한 게이머들은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사펑이 제대로 업데이트되는 것을 바라겠지만 지속적인 수익을 내야 하는 회사 입장에서 언제까지 이미 출시된 게임의 사후 지원에 투자할지는 미지수다.
그동안 게이머들이 CDPR을 칭송해 마지않던 이유는 기술력이나 스타 개발자 때문이 아닌 '유저 친화적'인 회사의 운영철학 때문이었음을 잊지 않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