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지마 히데오 감독의 첫 독립작 데스 스트랜딩(이하 데스스)을 얼마 전 마쳤다. 엔딩까지 플레이 타임은 약 50 시간.
잘 알려져 있다시피 코지마 히데오는 35년째 게임을 제작하고 있는, 말 그대로 '살아있는 전설'이란 표현이 어울리는 게임 업계 거물이다.
보통 이 정도 짬밥이면 은퇴하지 않더라도 실무에선 한 발 물러나 전체적인 검수나 총괄 역할을 맡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사람은 세계관 설정부터 실제 게임 디자인, 시나리오 및 각본, 심지어 OST 선정까지 거의 모든 부분에 직접적으로 관여한다.
코지마 히데오가 코나미에 재직한 30여 년 간 메탈기어 솔리드 시리즈를 통해 명성을 얻었기에, 퇴사 이후에도 메탈기어 솔리드의 정신적 후속작을 표방하는 게임을 만들었다면 쉽고 안전하게 성공할 확률이 매우 높았다.(실제로 그래 주길 바라는 팬들도 상당수였다)
하지만 코지마 히데오의 대답인 데스스는 메탈기어 솔리드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존재하긴 하지만 세계관부터 게임 플레이까지 완전히 새로운 게임이었다.
무려 35년 동안 현역 개발자로 활동하며 과거의 유산에 기대거나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창의적이고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점에서 코지마 히데오는 존경받을만한 게임 제작자라고 생각한다. 데스스의 게임으로서 호불호를 떠나서 말이다.
또 하나 중요한 건 새로운 도전과 실험적인 요소만 있고 게임의 본질인 재미가 없어 팔리지 않는다면 결국 성공한 게임이라고 할 수 없는데, 데스스는 500만 장 넘게 팔리며 상업적으로도 성공했다는 점이다.
이렇듯 데스스는 게임성과 흥행에서 모두 성공했지만 다른 히트작들보다 호불호가 훨씬 심하게 갈리는 편인데,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지나치게 길고 잦은 컷신' 때문일 거라 생각된다.
코지마 히데오가 알아주는 영화광이고 원래 꿈도 영화감독이었다는 건 예전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고, 게임 내 컷신을 통해 영화와 같은 연출을 즐겨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문제는 이게 너무 과해서 메탈기어 솔리드 시절부터 일부 게이머들의 불만이 있었다.
그나마 코나미 시절엔 제재할 높으신 분들이라도 있었겠지만 본인이 보스인 회사에서 하고 싶은 대로 만들었으니 컷신도 원하는 만큼 넣었을 거고, 그 결과 데스스의 엔딩 시퀀스는 2시간에 육박한다.
게다가 노만 리더스, 매즈 미켈슨, 레아 세두 등 유명 배우들까지 비싼 돈 주고 캐스팅했으니 그들의 연기를 최대한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컷신을 많이 쓰고 싶었을 거다.
컷신은 배우들의 연기는 물론이고 퀄리티도 좋아서 말 그대로 '영화 같은 연출'을 보여준다.
또 초반부와 엔딩 시퀀스를 제외하면 잦긴 하지만 그렇게 긴 컷신은 많지 않다.
내가 문제라고 느낀 부분은 거의 모든 스토리 진행 부분을 컷신에 의존하는 구조라는 것이다.
A지점에서 B지점으로 배송을 하는 게임 플레이와 컷신을 통해 진행되는 스토리 파트가 완전히 분리돼서 따로 노는 느낌인데, 이게 코지마 감독이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이런 구조가 매끄럽지 않았고 맥을 끊거나 몰입을 깨뜨리기도 한다고 느꼈다.
배송 임무 하나 마칠 때마다 메탈기어 솔리드처럼 점수 평가하는 요소가 굳이 필요했을까 싶고, 스토리도 컷신에만 의존할 게 아니라 게임 플레이 안에 함께 녹여냈다면 좀 더 자연스러운 진행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스토리를 풀어나가는 방법도 개인적으로 좋지 않다고 느꼈는데, 플레이어들에게 사전 정보 없이 세계관에 사용되는 용어들을 쉴 새 없이 쏟아내는 등장인물들의 대화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요소들로 가득한 초반부 스토리 진행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만 반대로 지루하게 만들 수도 있다.
실제로 초반부의 길고 이해하기 어려운 스토리 컷신을 견디지 못하고 스킵한 유저들은 이후에도 스토리 컷신 나올 때마다 스킵하면서 스토리엔 전혀 몰입하지 못한 채로 오로지 배송하는 재미만으로 게임을 플레이한 경우도 많다고 한다.
코지마 감독은 초반에 설명 없이 일단 늘어놓고 후반부에 가서 퍼즐을 조립하며 관객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영화 같은' 연출을 데스스에서 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밸런스 조절에 실패했고 그 결과 엔딩에서 2시간 내내 부족했던 설명을 하는데 급급했던 것이다.
데스스가 발매된 후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하고 언택트 시대에 들어서면서 묘하게 게임 내 분위기와 맞아떨어지는 부분들이 생기며 코지마 히데오가 시대를 내다봤다는 찬사가 나오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스토리나 세계관에 깊게 몰입하진 못했다.
굳이 가상의 국가가 아닌 (오히려 설득력이 떨어지는)미국을 배경으로 한 이유를 모르겠는데, 아무리 황폐해졌다곤 하나 게임 내 월드에서 미국임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은 전혀 없다.
또한 애초에 걸어서(물론 차량도 이용하지만) 미국을 횡단한다는 게임 내용부터가 너무 현실성이 떨어진다.
게임에서 현실성을 따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존하는 것을 설정으로 삼을 경우 자연스럽게 실제와 비교하게 되고 그로 인해 느껴지는 괴리감은 몰입을 떨어뜨릴 수 있다.
이러한 여러 무리수(?)들을 종합해 볼 때, 코지마 히데오는 데스스를 통해 세계적인 배우들을 데리고 미국을 배경으로 영화를 찍는 유사 영화감독 체험을 하며 본인의 욕망을 해소하려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연결'이란 게임의 콘셉트는 괜찮았지만 스토리를 게임 플레이에 녹여내지 못하고 게임 내 방대한 텍스트들도 잡다한 게 대부분이라 결국 엔딩에 가서 과도한 설명을 늘어놓는 방식은 차기작에선 개선되면 좋겠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스토리와 상관없이 데스스의 게임 플레이 핵심 요소인 '배달' 자체를 재미있어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만큼 게임 디자인은 잘 만들었다.
처음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혼자 등짐 짊어지고 배달하는 게 무슨 재미가 있겠냐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막상 해보면 특유의 황량하고 고독한 분위기(OST도 한몫한다)에 빠져들게 되고 점점 늘어나는 장비들을 활용하는 재미가 있다.
또 직접 만날 순 없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이 설치해 놓은 다리나 사다리, 밧줄 등을 이용해 험난한 지형을 헤쳐나가고, 서로 좋아요를 주고받으며 데스스의 주제인 '연결'되어 있음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하는 시스템도 좋았다.
하지만 전체적인 지형구조가 다채롭지 못하고 배송 자체가 목적이다 보니 어쩔 수 없지만 스토리가 배제된 보상만을 위한 서브 퀘스트들, 단순하고 부족한 패턴의 전투 및 인카운터 요소 등 오픈 월드 게임으로는 부족한 부분들이 많아서 스토리 퀘스트 외에는 거의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확장팩 격인 디렉터스 컷의 발매를 앞두고 있고 최근엔 데스스 속편 개발에 대한 루머도 있었지만, 개인적으론 새로운 게임으로, 영화감독 욕구는 데스스로 어느 정도 푸셨을 테니 좀 더 게임 디자인에 집중한 차기작을 만들어 주면 좋겠다.